엔딩노트 - 인생의 졸업식 트렌치코트


이 작품의 감독인 스나다 마미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가족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왔다고 합니다. <엔딩노트> 역시 감독 가족의 모습이 담긴 다큐멘터리입니다. 정확히는 죽음을 앞둔 아버지 스나다 도모아키의 이야깁니다. 성공적인 샐러리맨 생활을 마감하고 남은 인생을 즐기려던 스나다 도모아키는 의사에게 간암 말기 통보를 받습니다. 그는 성실하고 꼼꼼한 자신의 성격대로 남은 기간 자신이 하고 싶은, 해야 할 일들을 담은 엔딩노트를 작성합니다.


<엔딩노트>의 가장 큰 미덕은 영화의 분위기입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가 머리맡에 놓여있는 작품이지만 우울하지 않고 담담하고 위트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이는 연출자의 의도라기보다는 이 영화에 스나다 도모아키의 인생과 성품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고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나름대로 인생을 즐기면서 산 사람입니다. 가족 간의 특별한 불화도 없고 자식들도 모두 자신의 일을 하며 잘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풀고 가야할 한이 별로 없습니다. 굉장히 축복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는 뛰어난 유머감각의 소유자입니다. 아들에게 자신의 장례식 절차 전반을 인계하면서 ‘나중에 진행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라.’는 식의 아이러니를 활용한 유머를 구사하는 수준입니다.


이런 영화의 분위기는 단순히 극을 따뜻하고 재미있게 만드는 역할만 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누군가와 울고 불며 묵은 감정을 풀고, 못하고 죽으면 너무 한스러울 것 같아서 무언가를 꼭 해야만 하는 식의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관객은 죽음 자체를 성찰하는데 집중할 수 있습니다.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나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죽음 이후는 도대체 어떤 세계가 있는지 등의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질문들을 던질 수 있는 여백이 있는 작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마냥 담담하고 심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자식들은 눈물을 안 흘릴 수 없고, 부인은 그동안 남편과의 관계에 후회가 남고, 당사자는 귀여운 손주들이 자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노모를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 자신의 생명이 소멸해 가는 것에 슬픔을 느낍니다. 이는 한 사람의 죽음에 당연히 따라오는 감정들입니다. 애써 과장하지 않아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슬픔입니다.


이렇게 <엔딩노트>는 한 남자의 마지막을 과장하지 않고 당사자의 개성과 죽음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잘 드러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는 이 영화가 애초에 특정한 연출의도를 가지고 제작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스나마 마미 감독은 영화를 만들 생각으로 아버지의 마지막을 카메라에 담은 게 아니라고 합니다. 원래부터 자기 가족의 모습을 촬영했기에 아버지의 마지막도 자연스레 촬영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엔딩노트>에 품고 있던 한 가지 석연치 않음이 사라졌습니다. 작품 자체는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 찍는 사람들 진짜 잔인하다, 어떻게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나.’하는 생각도 들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뒤늦게 이해가 됐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꿈꾸며 살아온 딸, 아버지가 자식들 중 유일하게 걱정하는 이 막내 딸이 아버지의 임종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카메라를 꺼내 그것을 촬영하는 일이라는 걸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드니 이 작품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영화 속 내레이션의 화자는 스나다 도모아키지만 실제 그 목소리를 내는 건 스나다 마미 감독입니다. 그 내레이션을 녹음하는 동안, 영화를 편집하는 동안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어떤 생각을 했건 그녀는 그 과정 속에서 아버지의 입장도 되어보고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들을 고통스러울 만치 여러 번 곱씹었을 겁니다. 이는 영화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추모 행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스나다 도모아키의 장례식으로 시작해 다시 장례식으로 끝이 납니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에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그의 장례식을 보면서 영화 초반에 나왔던 그의 은퇴식이 떠올랐고 제가 직접 경험해 본 졸업식도 연상되었습니다. 과업을 모두 수행하고 졸업한다는 건 뿌듯한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줍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이별이 뒤따릅니다. 함께 동거 동락했던 많은 사람들과 공간, 시간과의 이별입니다. 아무리 그리워해도 다시는 그 시절로 회귀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성실하기 만해 묵묵히 흘러갈 줄만 알기 때문입니다. 장례식도 이런 졸업식 같습니다. 한 평생을 산 노고를 치하하고 이별을 슬퍼하는 일입니다. 물론 졸업식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졸업을 흔히 또 다른 시작이라고 표현하는데 인생을 졸업하고 나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은 후에 알게 되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알려줄 수 없습니다. 아무런 비밀이 없는 사람이라도 가질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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