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폴링 - 그녀의 낮과 밤 트렌치코트


  세자르 상 7개 부문을 수상했던 <세라핀>의 연출과 주연 배우, 마르탱 프로보스트와 욜랭드 모로가 다시 만난 작품입니다. 아일랜드의 작가인 키스 리지웨이의 소설 <나쁜 길>이 원작이라고 합니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로즈라는 중년 여성이 남편을 살해하고 아들에게 가지만 아들과의 행복한 생활을 꿈꾸던 그녀의 환상은 깨지고 결국 경찰에게 덜미를 잡혀 체포된다는, 꽤 드라마틱한 이야기임에도 마르탱 프로보스트 감독은 언뜻 보기에 미니멀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결코 마냥 잔잔한 영화는 아닙니다.

 
대개의 좋은 영화들은 첫 장면에서 연출 비전과 작품의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롱 폴링>의 첫 장면도 그렇습니다. 카메라는 어둑한 시골 숲길을 비추고 있습니다. 저 멀리서 젊은 여성이 걸어옵니다. 그녀가 한참을 걸어와 카메라 앞에 당도하자 그제야 카메라가 인물을 따라 움직입니다. 하지만 이 적막함은 차 소리와 여자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로 흔들리기 시작하고 도로 옆에서 손을 흔드는 여자를 비틀대던 차가 그대로 들이받으면서 완전히 깨져버립니다. 이렇게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는 잔잔하지만 긴장과 이완 오가는 완급 조절도 뛰어나고 부차적인 설명 없이 시청각적인 요소들로 상황과 인물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치밀하게 연출된 작품입니다.

 
로즈의 과거를 보여주는 방식도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방 안에 불을 키고 있다가 차 소리가 나자 불을 끄는 행동에서, 남편이 부재한 사이 짐을 쌓다 나갔다 들어오는 이상한 행동에서, 멍이 있는 그녀의 등에서, 잠자리에 있다가 남편의 발자국 소리가 나자 극도로 불안해하는 행동을 통해서 그녀가 오랜 기간 폭력에 시달려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가 남편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은 단 한 번 등장하고 그마저도 감독은 침대 밑에서 발로 채이고 있는 로즈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 않지만 관객은 그녀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야기도 사실주의적인 외양을 띄고는 있습니다만 자연스럽게 스며있는 장치들이 많습니다. 로즈가 남편을 살해하기로 마음먹는 특별한 계기를 보여주진 않지만 차 시트에 묻어있던 젊은 여자의 피를 닦던 모습, 남편이 사고를 일으킨 그 장소에서 남편을 차로 치여 죽이는 장면이 결합되면 로즈가 젊은 여자의 복수까지 하는 느낌을 줍니다. 어쩌면 로즈는 한 사람을 죽이고도 전혀 변하지 않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그를 죽여야 할 당위성을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속 공간의 활용도 재미있습니다. 로즈는 남편을 죽이고 시골집을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 공간은 그녀의 공간이 아니라 남편이 지배하던 공간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공간이 없습니다. 영화 속에서 로즈는 2번 눈물을 흘리는데 한 번은 극장에 들어가 알랭 레네의 <뮤리엘>을 보며 흘리고 한 번은 상점에 모퉁이에 숨어서 눈물을 흘립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점원과 눈이 마주치면서 흐르던 눈물을 훔치고야 맙니다. 그녀에겐 마음껏 울 공간조차 없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로즈는 장례식 후 자신이 끔찍이 사랑하는 아들의 집으로 가는데 아들 토마스 역시 애인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곳은 아들의 공간도 아니고 아들과 아들 애인의 공간입니다. 결국 그녀는 그 집을 나와 여관으로 가는데 이 여관 주인은 로즈의 사정을 알게 되자 그 공간을 로즈의 도피처로 아예 내어주려고 합니다. 극 중에서 로즈와 진정으로 연대하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이 여관 주인입니다.

 아들과의 행복한 삶을 꿈꾸던 로즈가 그 꿈이 환상이라는 걸 느끼게 되는 과정에서도 공간은 빛을 발합니다. 아들의 집에 당도한 후 로즈가 아들과 초밥을 먹는 장면에서 그녀는 정말 행복해 보입니다. 그 공간에는 두 사람만 존재합니다. 하지만 둘의 다음 식사 장면은 전혀 다릅니다. 아들의 태도가 많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감독은 일부러 식당의 큰 창을 걸고 거리에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을 두 모자와 함께 보여주며 모자의 물리적인 밀착을 훼방 놓습니다. 이후 로즈는 아들을 따라 클럽에 가는데, 시골 농장에서 가축들의 먹이를 주던 중년 여성이 루퍼스 웨인라이트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클럽에 가 있는 모습은 이질적으로 느껴집니다. 아들 친구의 친절로 따라오긴 했지만 그녀 역시 편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곳은 그녀의 공간이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그곳에서 형사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극도로 불안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욜랭드 모로의 연기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종일관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러한 표면 밑에 미세한 표정의 변화는 연출한 티를 많이 내지 않는 이 영화의 스타일과 닮아있습니다. 욜랭드 모로는 단순히 표정만으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묵직한 몸, 느린 움직임 등을 통해서도 로즈라는 캐릭터를 표현해냅니다. 또 단순한 주변인물을 넘어 꽤 주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아들 토마스를 연기하는 피에르 모레 역시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외모에서 풍기는 다정함과 부드러움 이면에 들끓고 있는 죄책감과 분노를 예민하게 표현해냅니다.

 이렇게 <롱 폴링>은 꾸미지 않은 듯 절묘한 솜씨로 로즈와 토마스의 생의 한 지점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영화가 무언가 적극적으로 발언하기를 원하는 관객은 이런 스타일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 가지 강한 맛을 내지 않기 때문에 음미할수록 깊은 풍미를 지닌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프랑스어 제목은 <밤은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로즈는 항구에서 경찰에게 잡힌 후 바다 바람과 태양의 따사로움을 느끼려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듭니다. 그녀는 아마 감옥에 갈 것입니다. 로즈에게 갑자기 찾아왔던 짧았던 낮은 그렇게 가버리고 다시 밤이 찾아오지만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며 살았던 그 시절 보단 덜 어두운 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찾아올 낮을 차분하게 준비할 수 있는 밤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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